피아노를 친 지 이제 막 한 달이 지났다. 따져보면 지난 한 달 중에 약 이틀을 쉬지 않고 피아노만 쳤는데, 나는 지난 수 년 간 전공이 아니면 배워보려는 고려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학부 때도 유난히 미쳐있던 이론 수업 외에는 힘이 딸려 실기도 겨우 따라간 마당이었고 졸업 이후에는 여유가 많이 생겼어도 오히려 작가가 되겠다는 작심에 마음만 초조해져서 미술 관련이 아니면 아예 가능성을 닫아두려 했다. 그런데 간만에 활력을 주는 취미생활에 다른 것도 아니고 피아노가 껴들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1) 그게 하필 피아노일줄은 : 피아노의 매력과 악기 연주가 내게 주는 의미
나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고 싶을 때, 예를 들면 특별하고 어색한 이벤트(결혼식, 시상식, 전시회 오프닝 등), 값비싼 레스토랑 혹은 그런 레스토랑을 자처하는 싸구려 레스토랑, 또는 드라마에서 신데렐라 여주와 상류층 남자의 파티를 위한 배경음악으로 클래식의 익숙한 곡조들이 지나치게 남발됐기 때문에 듣자마자 진부하고 나중엔 음악만 들어도 그런 이미지들이 자동으로 떠올라 거북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 감상이란 취미는-그동안 갖고 있던 이런 선입견을 대입해보았을 때-취향의 섬세함을 요구하는 다른 값비싼 취미들에 비해 뭔가 비교적 조롱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올드하고 재미없어보였다.
과거 클래식의 ㅋ도 모르는 우리 과 학생들에게 교양과목 '음악감상법'의 교수이자 현직 성악가인 모 선생님의 관대함과 참을성(?),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완전히 빠져있는 것 같은 프로 음악가의 매력 덕분에 몇 번씩 더 찾아듣고 유심히 들었던 적은 있다. 비록 수업기간 때 뿐이었지만 '현재 음악 활동을 하는' 그의 고무된 에너지가 우리에게 잠시지만 전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 때 선생님이 시험 문제로 내줬던 클래식 대표곡 마흔 곡에 대해서는 그래도 제목이나 탄생 스토리같은 건 조금씩 구별하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클래식은 동물원의 공작새 같은 느낌이라 그 이후로 일상에 감동을 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예전부터 보면 건반 악기의 특질은 계속 좋아해왔던 것 같다. 밴드에도 기타 대신 신디, 혹은 클래식 피아노가 들어있는 밴드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벤폴즈파이브의 벤폴즈(Ben folds)는 드럼이나 여타 전자악기의 볼륨을 뚫기위해 완전 락킹하고 떼룽떼룽하게 연주하는데 One Angry Dwarf and 200 Solemn Faces 같은 곡에서는 마치 자전거를 탈 때 가속을 내기 위해 선 채로 페달을 밟 듯이 엉거주춤 선 채로 갈겨치는 퍼포먼스(라기엔 훨씬 필요에 의한 모션)가 인상적이다. 잘 모르는 쪽이지만 재즈도 좋아하는 건 반드시 피아노가 있는 곡이었는데, 이 묵직한 섬세함이 가벼운 타격감을 만날 때의 케미가 정말 맘에 든다.
[비교적 최근 공연이었던 벤폴즈파이브의 2013년 'One angry dwarf~']
[빌리조엘의 2006년 'Zanzibar']
[US3 - Cantaloop(Flip fantasia)]
직접 악기를 다뤄보며 느낀 매력 중 하나는 악기 자체의 특질, 셈여림을 조절하면서 나는 소리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이다. 동시에 맑음을 잃지 않는 음색. 점점 여려져 거의 간지럽히듯 건반을 눌러도 명주실처럼 주욱 소리가 뽑혀나와서 끊어질 줄 모르는 그 소리는 마치 사람의 말 사이사이에 섞인 숨소리 같다. '소리 반 공기 반'이란 명언처럼, 특히 독주이거나 혼자 부르는 노래에서는 어떤 일관된 흐름보다는 순간적으로 소강하는-공기가 느껴지는-미묘함에 굉장한 감동이 있다. 여러 연주자의 버전을 들었을 때 인/아웃 되는 부분에서 유난히 그 울림이 숨소리처럼 들리는 것들이 있는데, 그 몇 초도 안 되는 부분 때문에 자꾸만 그 작곡가의 버전으로 다시 듣게 된다.
[안드레아스 보이드의 브람스 환상곡 op.116 4악장] - 유난히 브람스의 음악에서 이런 숨결이 많이 느껴진다.
둘째는 음악 연주의 전반적인 속성인데- 악보는 하나이고 기호와 음표도 정해져 있지만 치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른 소리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저 모두의 연주는 모두 다르다는 점이 연주를 포기하지 않고 그저 더 치고 싶게 유혹한다. 물론 짱 어려운 곡은 그 곡을 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경탄스럽지만 치기 쉬운 곡도 역시 표현의 섬세함에 있어서는 치기 나름이기에 어려운 곡을 잘 치는 사람이 꼭 쉬운 곡을 잘 친 단 법도 없다. 또 내 연주만 생각해도 어떤 날은 이 곡이, 어떤 날은 저 곡이 잘 될 때가 있다. 그래서 늘 다음 연주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연주의 즉각성(: 건반을 누르기 시작하면 그 뒤로는 연주의 흐름에 들어가버릴 수 밖에 없는 속성이랄까? 그냥 내가 만들어본 말..)으로 인해 피아노를 치고 있는 순간에는 자신을 계속 신뢰하는 상태가 되며 또한 그 정도로 충실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악기를 연주할 때는 악기만을 연주할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것, 달리 말하면 멀티태스킹을 강제로 제약당할 수 있어 좋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흠뻑 빠질 수 있는 일이 있는 건 소중하다. 이건 결과적으로 요즘 내 삶에 필요했던 부분이다. 그래서 시간을 뺏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또 다른 집중을 할 수 있게 해준다.
(2) 음악 연주 어플리케이션 'magic piano' /드뷔시, 사티, 리얼리즘의 두 노선(감각적/개념적)
그러던 나는 최근 우연히 드뷔시를 접한 뒤 클래식 음악에 빠져버렸다. 무심코 다운받은 'magic piano'라는 smule사의 연주 어플(자매품으로는 기타와 오토튠 랩, 보컬 믹싱이 되는 가라오케 어플이 있음)로 드뷔시 등 여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면서부터다. 박자에 맞춰 내려오는 노트를 손으로 터치해 연주하는 방식인데, 리듬게임처럼 화려한 그래픽 없이 간소하게 정말 연주만 하는 것이다. 복잡한 화음일 수록 노트 갯수가 많아지며 정확한 박자를 맞춰서 쳐야지만 고득점을 올린다. 이렇게 속성으로 피아노 연주 체험을 해보는 건데, 어렵고 난해한 곡이라도 사실 손가락 네 개로 치는 거니까 실제보다 훨씬 쉽게 완곡을 칠 수 있다.
자매품 어플들도 써봤는데 모두 직관적으로 다루기 쉬워 연주에 대한 흥미를 절로 돋운다. 노트에 맞추어 액정을 훑다보면 기타의 줄을 실제로 튕겨보면 어떨까 싶고, 거기에 목소리까지 덧입히니 마치 뮤지션이 된 착각에라도 들게 한다. 청춘이라면 C나 D 마이너 정도는 누구나 잡을 수 있던 통기타 시대에 비하면 지금은 악기 연주 자체를 접할 기회가 잘 없는데, 비록 화면을 가볍게 터치터치하는 거지만 동작 자체가 오리지널 악기를 닮아있어 실제 악기에 대한 관심으로 금방 넘어가게 해준다. 나도 손가락에 힘아리가 없어서 가장 가냘픈 악기의 도움을 받은 것 같은 느낌으로 어플을 갖고 논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로 가는 길을 돕다니 재밌는 일 아닌가...
특히 다른 곡에 비해 드뷔시의 곡에 유난히 빠져들었고 유독 '잘'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것은 실제 악기 연주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직 드뷔시는 못 치지만 요새 그나마 쉬운 곡 몇 마디 는 떠듬거리며 치는데 가슴이 벅찬다.ㅋㅋ 뭔가 피아노 속에서 지금까지 발견한 적 없는 황금 딱지같은 걸 꺼낸 기분이랄까.. 뮤지션들이 왕왕 쓰던, 악기 속에서 음악이 들어있다는 표현이 이런거겠거니 한다.
유별나게 드뷔시를 좋아할 만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미술에서의 취향과 닿아있는데 모더니스트들의 어떤 과도기 양상? 전통적 틀을 벗어나지 않지만 감상이 아닌 감각에 호소하는 애매모호한 음의 진행방식 같은 게 자연에 가깝단 느낌이 들어서인지 드뷔시를 들으면 무아지경 같은 걸 느낀다.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의 전주곡. 드뷔시를 가장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곡 같다.]
그러면서도 파편적으로나마 '서사적인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것이 비슷한 흐름에 있던 사티보다 드뷔시를 더 좋아하는 이유이다. 드뷔시가 모네라면 사티는 좀 더 드라이하고 실험성이 강한, 따지자면 아웃풋이 여전히 페인팅인 큐비즘 작가에 비할까? 정작 작가 본인은 다다이스트였던 것 같다(실제로 다다이즘 전문지에 많은 글을 투고했다고 함). 사티의 음악은 보다 쾌적하고 주제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정말 그의 말대로 '가구 음악'. 무언가의 배경음악으로서 들려지길 더 좋아했다던 작가의 의도처럼 21세기와 더 잘 어울리는 음악같다. '개를 위한 정말 나른한 전주곡', ''바싹 마른 태아'와 같은 곡명은 그냥 2014년의 모 설치예술가의 작품명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에릭사티의 짐노페디 1, 2, 3]
나는 얼핏 어떤 글에서 사티가 '자신은 다른 음악가들의 지나치게 부풀은 에고가 불편하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했던 걸 떠올린다. 연주회에서, 한 사람의 연주에 모든 관객이 집중하고 있는 현장을 참을 수가 없었던 사티는 심지어 자신의 연주회가 있는 전시장에 찾아온 관객들에게 자신의 연주를 신경쓰지 말고 돌아다니라고 일일이 얘기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다소 괴팍스럽긴 하지만 이런 그의 행동이 모순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자신의 오감을 음악에 완벽히 집중하기 보다는 좋아하는 음악을 배경삼아 놀고 싶어 하는 요즘의 사람들이 클럽을 가고 음악 페스티벌을 가는 이런 풍경을 보고 싶었을지도.
어느 칼럼 제목처럼 '너무 일찍 찾아온 미래*'의 사람이었던 사티(-"나는 너무 늙은 시대에 너무 젊은 채로 이 세상에 왔다."). 그래서일까 다른 대가들처럼 연주회장이 아닌 씨에프에서 더 자주 들을 수 있는 사티. 하지만 여기에도 살짝 함정은 있는데, 짐노페디 이외에는 상당히 음침하거나 여전히 생소한 감성이라 21세기에 왔어도 사실 백퍼 비주류..에 오덕...(미안해요 사티 ^_ㅠ) 그래도 비슷한 발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에 왔으면 좀 더 재미나게 살지 않았을까! 너무 고독하게 살았다고 하니..
갑자기 사티에 대한 생각으로 빠지긴 했지만 음악사의 넓은 지형 안에서 드뷔시 역시 그렇게 메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이 두 사람 다 끝나가는 시대의 막차이면서, 새로 올 시대의 첫차였다. 옛것이라기엔 너무 새롭고, 요즘것이라기엔 구식인.. 뭐 나야 언제나 이런 것들을 사랑하니. 클래식에 하나 관심도 없던 내게 하필 드뷔시가 다가온 것은, 연주장 바깥에서도 살아있을 수 있는 무슨 힘이 있지 않았을까.
어느 시대에나 이상하게 시대를 타지 않는 음악가&음악이 나오곤 한다. 몇 십년 뒤에 들어도 신선한. 그들이 과거에서 현재로 뜬금없이 튀어나와 나를 맞아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2014.11.21 (수정: 2015. 3. 19)
*'너무 일찍 찾아온 미래, 에릭 사티' 칼럼 :
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1487&contents_id=42518
+) 사티보다 조금 전 세대인 라벨의 Jeux d'eau(물의 유희). 사티가 라벨한테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