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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의 덫 / 문학을 소화할 수 없는 이유

by chord_S 2016. 8. 15.

(1)

54. "저로서는 적어도,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마음에 달린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저의 경우에 비춰보면 알 수 있는걸요. 왜 그런지 정신이 산란하고 울화가 치밀어서 참을 수 없을 때면, 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정원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대무곡을 몇 곡 불러보거든요. 그러면 거뜬히 나아버린답니다."라고 그녀가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고 나는 대꾸했다. "우울증이란 꼭 게으름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은 게으름의 일종입니다. 우리 인간의 천성은 게으름으로 기울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가다듬고 분발하기만 하면, 일은 잘 진척되고 활동 속에서 참다운 기쁨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프리데리케는 매우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반면 그 젊은 슈미트 씨는 스스로를 억제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하물며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항변하였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불쾌감입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이어서, "누구나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시험해 보기 전에는 제 힘으로 어느 정도까지 해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일단 병에 걸리면, 누구나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자기가 갈망하는 건강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괴로운 절제나 쓰디쓴 약이라도 싫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55. ~ 이윽고 그 젊은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우울증을 악덕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좀 과장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천만에요." 하고 나는 대꾸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들에게까지도 해를 끼치는 짓은 악덕이라고 불러 마땅할 겁니다. 우리가 서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더군다나 각자가 그래도 가끔 자기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즐거움마저 서로 빼앗아버려야 한단 말입니까? 자기 자신은 우울증에 걸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혼자서 꾹 참고 견디어내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기쁨을 망쳐놓지 않으려고 애쓸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 있다면, 그 이름을 대보십시오! 우울증이란 자기가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내심의 불쾌감, 자기 불만이라고 할 수 있고, 어리석은 허영심의 사주를 받은 질투심이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행복한 사람들을 보면 못 견뎌하는 그런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기화로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소박한 기쁨마저 빼앗아버리는 자는 한심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선물이나 호의로도, 그 같은 폭군의 질투로 가득 찬 심술 때문에 송두리째 망쳐버린 순간적인 즐거움 그 자체를 보상받을 수는 없습니다."



(2)

104. 기다리자! 기다리자! 그러면 차차 나아질 것이다. 정말이지, 친구, 자네 말이 옳아. 날이면 날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쫓겨 돌아다니는 동안 그들이 하는 것들과 꼴을 보고, 나는 이제 나 자신과 훨씬 더 잘 어울리게 되었다. 확실히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와, 그리고 우리를 모든 것과 비교해보도록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행불행은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대상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독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문학의 환상적인 이미지에 영향받은 우리의 상상력에는 본질적으로 더 높은 것을 추구하려는 충동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피조물을 한층 고양시킨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이게 되어 우리 이외의 것은 모두 우리보다 훌륭하고 누구 할 것없이 우리보다는 완전해 보인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여러가지 있다고 우리는 느낀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족한 바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모조리 그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이상적인 삶의 즐거움마저도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행복한 사람이 한 명 완성되는 것인데, 이처럼 완벽하게 이룩된 사람이란 사실은 우리 스스로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중


(1) 우울증에 대한 그의 의견이 지당하다고, 처음엔 그렇게만 읽었다. 그러나 이 말을 한 베르테르는 결국 죽지 않는가. 그러고보니 우울증에 관한 그의 진술에서 절제되지 않는 우울이 누출되는 것 같다. 우울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나 혐오가 없다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나올 진술이 아니었다. '일단 마음을 가다듬고 분발하기만 하면', '아무리 괴로운 절제나 쓰디쓴 약이라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하면서'와 같은 표현은 증상이 있는 본인에게 돌리는 죄책감으로 설명된다. 우울을 벗어날 방법을 아는 로테나 우울증에 걸려든 사람(자신)에 관대한 슈미트 씨와 달리, 베르테르는 우울에 빠져버린 (필시, 남이 아닌 자신의) 상태를 용서할 수 없다. 그는 대무곡을 부르는 대신 괴로운 절제와 쓰디쓴 약을 택하는데, 이미 이와 같은 처방 자체가 너무 우울한 것이다. 


(2) 고독의 착시에 대한 빛나는 통찰. 그리고 위와같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착각하지 않는 것 사이의 너무 큰 골짜기. 나보다 나은 완벽한 사람이란 (처음부터)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미리 상실해버리고 마는 우울증자의 집착*일 것.

 


* 욕망의 대상-원인이 원래부터, 어떤 구성적인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구성하게끔 만드는 방식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이라면, 우울증은 이 결여를 일종의 상실로 이해한다. 마치 이전에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요컨대 우울증이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욕망의 대상이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 욕망의 대상의 출현은 그것의 결여와 포개어져 있다는 사실, 욕망의 대상이란 어떤 공허/결여의 실정화일 뿐 '그 자체로는' 실존하지 않는 순전한 왜상적(anamorphic) 실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인 것은 결여를 상실로 옮기는 우울증의 이 기만적인 번역이 우리로 하여금 대상의 소유를 주장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을 상실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으로, 무언가를 상실했다면 이전에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바로 이런 논리하에 우울증자는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상실한 대상에 고착시키고, 바로 그 상실의 포즈 속에서 그럭저럭 대상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 

우울증자는 초감각적인 대상을 그냥 관조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육체적 갈망을 느끼며 품에 안고 싶어 한다. 비록 이상적 상징 형식들이라는 초감성적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거부당했지만, 우울증자는 시간 속에서 부패하고 타락하기 마련인 우리의 일상적 현실을 넘어서는 또 다른 절대적 현실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열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보통의 감각적으로 물질적인 어떤 대상(가령 사랑하는 여자)을 절대적인 것으로 승격시키는 길뿐이다.

따라서 우울증적 주체는 그가 갈망하는 대상을 육체를 지닌 절대성이라는 모순적 혼합물로 승격시킨다. 하지만 이 대상도 육체를 지닌 이상 어쩔 수 없이 부패하기 마련이므로 그는 오직 그것이 상실되는 한에서, 즉 그것의 상실 속에서만 이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 헤겔은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 나섰던 십자군에 관해 말하면서 이러한 논리를 전개한 바 있다. 십자군 자신들 또한 2천년 전 유대 땅에 실존했던 물질적 육체에 신성의 절대적 성격이 깃들어 있을지 의심스러워했다 ㅡ 따라서 그들의 탐색은 필연적인 실망으로 귀착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까닭에 우울증은 단순히 상실한 대상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대상을 상실하는 최초의 몸짓 자체에 대한 집착인 것이다. (....)

조르주 아감벤은 우울증과 애도를 대비시키면서 우울증이 어째서 애도 작업의 실패, 즉 대상이라는 실재에 고집스레 집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이기도 한지 강조해왔다. "대상의 상실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것을 미리 내다보고 한발 앞서 애도하고자 한다는 점에 우울증의 역설적인 성격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울증의 책략이다. 즉 우리가 이전에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던, 애초부터 상실된 상태였던 어떤 대상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수중에 넣고 있는 어떤 대상을 마치 그것이 이미 상실된 것인 양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자는 애도 작업을 완수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그와 정반대의 형식으로, 즉 아직 대상이 상실되지도 않았을 때조차 그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애도를 표하는 거짓 장면을 연출하는 방식으로 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울증자는 상실한 대상에 고착되어 있어 애도 작업을 수행할 수 없는 주체가 아니라, 차라리 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그러나 그 대상을 욕망하게끔 만들었던 원인이 철회되어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욕망을 상실해버린 주체이다. (....) 우울증은 우리가 마침내 욕망하던 대상을 얻었을 때, 그러나 그것에 실망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우울증(실제적이고 경험적인 모든 대상들, 그중 어떤 것도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실망)은 사실상 철학의 시작이기도 하다. 

- 슬라보예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4. 우울증과 행동 중

(강조는 원문, 파란 글씨는 직접 표시)


어떤 문제에 해결책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감정은 탈출구가 없으며, 아무 것에도 이르지 못하며, 자가당착에 빠져버린다. 이 '해결책 없는 감성'은 각자가 깊이 성찰하지도 않고 고통받는, 우리 모두의 무의식적 비극이다. 


지독한 고독감에서는 냉소주의가 생긴다. 그 고난을 덜어주는 것은 오만함이다.


미적 언어의 기만 : 평범한 슬픔을 기이하게 표현한다. 사소한 불행을 미화한다. 공허를 치장한다. 한숨 혹은 빈정거림을 미사여구로 꾸며서, '언어를 통해서' 존재한다. 


-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중


요즘 문학을 맛보고 뜯고 씹어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