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에 관한 한나 아렌트의 명제를 생각해 보자. 아렌트는 평범성이라는 말로 아돌프 아이히만의 "천박한 무사고성"을 제기했으며 아이히만이 "자기가 저지른 짓을 결코 깨닫지 못한" 이유는 그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는 상상력과 의지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
아렌트가 인간의 악을 자연적 악에 근접한 그 무엇으로, 즉 끔찍한 의도는 없었으나 끔찍한 고통을 일으키는 사건으로 변형시킨 것은 아닌가? 그녀가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악이라는 것에는 무언가 자꾸 균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있으며,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좀처럼 서로 조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악의 평범성에 관한 아렌트의 명제에는 악을 쉽게 자리 매김 할 수 없다는 구약 성경의 핵심적 통찰이 깃들어 있다. 악은 공간적이지 않고 상황적이며, 고통을 유발하는 만큼 우리가 고통을 경험하는 방식에, 그리고 서로를 돌보지 않는 인간들만큼 인간을 돌보지 않는 세계에 관계한다. (...)
오래된 교도소 이야기들 중 가운데 하나는 재소자들이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해 결코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재소자는 정반대다. (...)
피조사자 알터 씨는 점점 더 규범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낼 수 있어. 그건 문제가 아니었지. 내 문제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나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거였어. 하지만 이제 배우고 있는 중이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면 누군가가 나를 통제할 거라는 사실을 말이야."
이는 후회 없는 책임성이며 교화된 재소자의 에토스(ethos)이다.
(...) 대중 매체는 책임성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사람들에 관해 떠들어 대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결여된 것, 즉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과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후회와 슬픔은 빠뜨린다. 미국 문화는 미국인들이 우울증적 위치에 머무르도록 장려하지 않는다. 미국의 자유 시민들은 대부분 자기 지식(self-knowledge)으로 자기 통제(self-administration)를 대체한다. (...)
마커스 씨는 아이였을 때 본 영화 스타워즈의 용어로 악을 정의한다. 다스 베이더는 악이고 루크 스카이워커는 선이며 삶은 곧 그들 사이의 투쟁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스카이워커가 다스 베이더를 제압한 후 베이더의 가면 뒤에 숨겨진 자신의 얼굴을 본다고 지적했다. 영웅은 악인이고 그의 악은 다른 누군가에게로 소외되어 마치 누군가의 몫인 것처럼 거기서 투쟁한다. 이는 신화적 메세지이면서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 완전한 진실은 우리 주위에 악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가면 뒤의 얼굴은 단지 당신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부인, 어머니, 아버지, 아이, 선생, 애인, 친구의 얼굴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이방인의 얼굴이며, 정신병 환자(그리고 정신병적 계기를 지닌 우리 모두)는 자기에 대해 그 이방인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하려 한다. 자신에게서 악을 발견하기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타자들 속에서 악을 발견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로 슬프고 고통스럽다.
그 차이를 아는 것은 두려움이 세상에 넘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스미스 씨는 자주 페인 양을 만나러 오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끌리는 척했지만, 실은 교도소의 모든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가 여자들이 사악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자기 욕구를 말한다는 것이 너무나 강력해서 그를 무력하게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은 가장 사악한 동물이야. 왜냐하면 남자로 하여금 자신들을 원하게 만들기 때문이지. 여자들은 우리 남성다움을 상실시키고, 여자들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도록 만들어. 보라고, 난 개과천선하려고 생각했지만, 여자 하나 때문에 나 자신을 망쳤어. 교도소에 있는 남자들 90퍼센트가 여자 때문에 들어와 있는거야."
내가 스미스 씨에게 물었다.
"왜 여자가 사악하다고 하시죠? 당신의 욕구 속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이라고 왜 말하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이 악을 약한 형태로 바꾼다고 생각하는데요."
스미스 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악은 결코 약해질 수 없어. 말도 안 되지. 악은 강함이고, 권력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보다 강한거야."
사실 악은 양자 모두이다. 악은 자기를 위협하는 헤아릴 수 없는 욕구의 두려움이고, 스스로 그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무엇이든 할 것을 아는 자기이며, 거기에는 욕망의 대상에 굴복하는 일까지 포함된다. 악은 또한 우리가 욕망의 대상을 공포에 질리도록 만들어서 욕망을 길들일 수 있다는 듯 이러한 경험에 적대하는 방어이다. 이러한 구별은 우리가 고통 받는 악과 타자들에게 부과하는 악 사이에서 한결 친숙한 형태로 반영된다. 우리가 도덕적 악을 타자들에게 부과함으로써 자연적 악을 회피하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적어도 "고통 받는 것만 빼곤 무엇이든 한다."를 모토로 삼는 무의식적 환상인 듯하다. 악행을 회피하는 일은 때로 단지 고통 받는 일과 연관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선과 악을 각각 침범할 수 없는 구역에 자리 매겨 놓은 채 애정과 증오의 충동이 일으키는 갈등으로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천국과 지옥,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 구원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 외의 여러 이분법적 특징들은 편집-분열증적 불안에서 기원하는데, 증오와 공격성이 넘치면 우리는 선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이분법적 분열은 선과 악을 분리하여 한쪽이 다른 쪽 또는 우리 자신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편집-분열증적 위치에서 나타나는 선택적 방어다.(...)
편집-분열증적 위치에서 악은 적의에 찬 사탄, 즉 파멸적 운명의 담지자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악을 변형시킬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적의와 시기뿐 아니라 자신의 적의와 시기는 여전히 실재적이고 파괴적이지만, 우리는 그것들 때문에 가슴 아파할 수 있다. 그러면 악은 슬픔과 동정의 원인이 되고 부과하는 것 대신 고통 받는 것이 될 것이다. (...)
- 찰스 프레드 앨퍼드,「인간은 왜 악에게 굴복하는가(What evil means to us)」,
제4장 악은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것이다 中
(* 강조와 파란 글씨 모두 직접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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